2014. 2. 28.

메모


1.
몇 개월간 혹사시켰던 나의 몸과 정신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두 번의 명절을 핑계 삼아 오랫동안 휴식을 가졌다. 밀린 영화와 드라마를 찾아보고, 지난 해 상반기부터 차곡차곡 쌓아둔 수많은 자료와 책더미를 정리하면서 새 해 두 달을 멍하게 보냈다.

귀국 후 매년 연초에 세웠던 '새해 계획'들을 살펴보면서, 내가 참 게으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마다 반복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째 해결하지 못한 채, 매번 새해를 맞이하면서 또다시 적어 놓은 내용들을 보면서 깊은 반성을 해본다.

조금만 쉬고 나서, 청소 좀 하고 나면, 새 다이어리를 마련하고 작성하겠다던 2014년 나의 새해 계획은 아직도 미완성이다.

2.
'우연'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몇 달 전 영화관에서 수거해 온 영화 리플렛들을 정리하면서 관심이 가는 영화에 관한 정보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 보고 있는데, 마침 그 영화와 관련한 내용이 라디오에서 언급되는 거다. 또는 한 건축가의 작품집을 오랜만에 꺼내 읽고 있는데, 때마침 라디오에서 그 건축가가 참여했던 '집고치기 프로그램'의 메인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오랫동안 못 본 사람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면, 며칠 안에 길에서 짧게라도 보게 되는 경우다.

이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뭔가 강한 힘이 내 주위를 흐르고 있고, 그 힘들이 나와 내 주변을,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서로 관계가 없었던 것들까지 이어주고 있다고 말이다.

작년 초, 일로 인연이 닿을 뻔했던 곳이 있다. 아쉽지만 매우 다행히도(?) 그곳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더랬다. 몇 주 전 그 곳과는 전혀 관계없는 지인의 긴급 도움 요청이 있어 사정을 들어보니, 바로 작년의 그 곳에서 곧 개최할 예정인 전시 준비 관련 일이었다. "세상 참 좁다"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이 분명 존재한다. 나의 관심이, 내가 엮어놓은 관계망이, 무섭고도 흥미로운 우연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중요하지 않은 만남이란 없다.

ⓒ 문호경

3.
오래전에 겪었던 안 좋은 경험과 관련된 사람이라도 반갑게 만날 수 있다. 껄끄럽기는커녕,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물론 다시는,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마주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여전히 불편하고 전혀 소통할 수 없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지난 두 달 동안 나는 이 두 종류의 사람을 각각 만나야 했다.

기억도 안나는 옛날 업무와 관련한 부탁으로 8년 가까이 한 번도 열어 본 적 없는 외장하드 안의 자료들을 살펴보면서, 그 시절의 나를 즐겁고 유쾌하게 마주할 수만은 없었다. 열정과 의지로 가득했던, 그래서 그만큼 더 많이 아프고 분노했던 내가 거기에 있었다.

4.
말실수한 사람들은 본심이 아니었다고, 실수였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실언의 내용은 사실 그 사람의 무의식에 늘 자리 잡고 있으면서 밖으로 삐져나올 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찔끔 찔끔 흘러나오다가, 절호의 기회를 맞아 결국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누군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행동을 보라"는 명언을 믿고 있지만, 가족처럼 지낸 지인의 말실수는 10년 넘은 인연을 끊어내기에 충분했다.

5.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아직 제대로 해본 적도 없으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 자꾸만 멈칫거렸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결정하자. 그리고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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