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19.

영화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Stories We Tell)>


중학교 1학년 때 일이다. 학년별 체육대회가 열렸던 날인데, 무슨 종목인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아마도 핸드볼이나 피구였을 것이다) 우리 반이 결승에서 지고 말았다. 웃고 우는 일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감수성 충만한 소녀들은, 교실로 들어와 그동안의 준비와 노력에 대한 아쉬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실제 경기에 선수로 뛴 친구들이건, 운동장 계단에 앉아 하루 종일 응원하느라 햇볕에 얼굴이 익어버린 친구들이건 할 것 없이 모두 눈물콧물범벅이 되어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종례를 하러 들어오신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음이 너무 힘들 때는 글을 써 보라고, 그러면 감정을 추스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선생님께서 나눠 주신 흰색 종이 위에 한참동안 서러움을 토해내고 나서야, 우리들의 눈물은 멈췄다.

작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램 중 '여배우, 카메라를 든 뮤즈' 부문에서 소개된 바 있는 사라 폴리 감독의 영화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감독의 어머니 다이앤 폴리의 '비밀'을 감독 자신의 가족과 주변인들의 인터뷰로 밝혀내는 다큐멘터리다.

Dir. 사라 폴리 Sarah Polley,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Stories We Tell, 2012

'사실'을 이야기 해줄 수 있는 어머니 다이앤은 이미 암으로 세상을 떠나 없지만, 사라 폴리 감독과 가족 및 주변 지인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기억의 조각들로 다이앤에 관한 '진실'을 구축해간다. 그리고 영화 속에 직접 등장해 인터뷰어 역할을 수행하는 사라 폴리는, 그 퍼즐 맞추기 과정을 대범하고 집요하게 카메라에 담아낸다.

때로는 눈시울을 적시며 묵직하게, 때로는 이웃집 여자에 관한 뒷담화처럼 가볍고 위트 있게(그래서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인터뷰에 임하지만, 시종일관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기억과 감흥을 솔직하게 꺼내놓고 드러내는 사라 폴리의 가족을 통해, "Every family has a story" 즉, 어느 가족이든 그들만의 역사와 이야기가 있다는 보편적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초반 인터뷰를 준비하던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 머쓱해하면서 던진 "우리 가족 이야기에 누가 관심을 갖겠어?"라는 질문이 무색하리만치, 관객들은 점점 사라 폴리 가족에게 지긋지긋한 내 가족을,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우리 집의 복잡다단한 일들을 투영하게 된다. 마치 그들 각자가 나를 대신하여 우리 가족 이야기를, 내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진다.

흥미로운 것은 어머니의 비밀과 가장 근접해 있는 사라 폴리의 아버지, 어머니의 옛 애인, 그리고 사라 폴리, 이 세 사람 모두 자신만의 버전으로 글을 쓴다는 점이다. 서로 주고받는 이메일로, 또는 각자 적어나가는 글(출판을 고려하기도 한)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놀라움과 기쁨, 고통까지도 용기 있게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 일'과 그 후 벌어지는 일련의 경험들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나 지우고 싶은 기억, 다시는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상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엄습하는 자신들의 감정(사라 폴리 자신도 '쓰나미'로 표현했던)과 여러 가지 판단들을 글로 찬찬히 기록하면서 다이앤을, 상대방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은 가족으로 남는다. 가족이 된다.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친밀하고도 느슨한 가족 관계가 계속 될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각자의 방식대로 표현하지만 서로에 대한 진심어린 배려임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글로 감정을 정리하는 일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일러준다. 실제 영상 자료 및 재현 영상 등 수많은 클립들을 섬세하고 뚝심 있게 엮어낸 이 영화가 이야기꾼 사라 폴리의 필모그래피에 중요한 작품으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공식 웹사이트 http://www.storieswetellmovie.com

* 2014년 3월 19일 현재, 서울 스폰지하우스(광화문)에서 상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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